中國의 正體(中)-中國은 友邦인가.



 

   1626년 10월 “홍타이지”(淸의太宗)는 “누루하치(努爾哈赤)”의 뒤를 이어 후금(後金)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는 우선 明나라 지배의 
요동(遼東)지역을 점령, 이를 고수하고 明나라와의 화친을 요청하게 된다. 홍타이지(皇太極)가 요동의 强者로 등극한지 채 3개월이 되지 않는 
1627년 1월에 3만의 병력을 수하장수 아민(阿敏)에게 주어 조선을 정벌하도록 명령한다. 우리는 이것을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부른다. 

누루하치가 요동과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던 대부분의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와 대립각을 유지한 해는 1616년이다. 그는 
무순(撫順)전투로 시작하여 그가 전사한 영원성(寧遠城) 전투까지 10년간 對明 전쟁을 통해 요하(遼河)의 동쪽(遼東)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는 명나라를 멸망 시키기 보다는 애초부터 요동지배, 그것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요동의 지배와 안정화는 후금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1600년대 초 여진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명나라는 이들에게 그 당시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인 호시(互市)와 조공(朝貢)무역을 
제한한 반면, 통일 여진은 커진 경제규모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요동이 필요하였을 뿐이다. 

후금에게는 다만 요동의 탈환을 노리는 명나라 보다는 親明정책을 고수하며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背後의 朝鮮이 항상 더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배후로부터의 위협,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군사행동, 바로 정묘호란이다. 이 침략에서 조선을 굴복 시키고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은후 對明 
전선에 전력투구 하려는 그들 나름의 전략이었지만 조선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즈음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황폐화 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조정은 東人과 西人으로 갈리어 심한 당쟁의 와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623년 광해군이 폐위되는 인조반정이 발생하고, 반정(反政)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된 이괄(李括)일당이 소위 “이괄의 亂”을 일으킨다. 
이 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실패한 도주잔당들이 후금의 누루하치에게 달려가 조선 인조등극의 부당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조선의 병력상황을 
설명하면서 어처구니 없이 조선의 정벌을 요구하게 된다. “못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는 심산인지 몇 푼어치의 권력에 눈이 어두운 반역자들의 
행동은 울고 싶던 정복자의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배신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에도 존재한다고 보고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과거 고구려가 멸망할 때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이 
권력투쟁에서 패하고 당나라로 도주하여, 唐의 군사와 함께 조국의 멸망을 도왔던 역사적 사실이 있지 않는가. 근세에 들어와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의 동학란때도 청국의 도움을 청하는 바람에 조선내부에서 일어난 자발적인 개혁과 자생적인 혁명운동이 좌절된 역사가 있다. 조선의 
일본합방을 도운 이완용, 송병준등의 매국노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방후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으로 달려가 스탈린의 각본대로 6.25전쟁을 도발한 비극도 한줌의 권력을 아들, 손자까지 물려주려는 세습 왕조국가를 
만들기 위한 퇴행적 민족 반역 행위였음이 이제 드러났지 않는가. 또한 현재의 북한이 위기상황이라고 하는데 권력자 주변의 집단이 그러한 
반역행동을 저지를 것 같은 예상이 되지 않는가. 최근 남한에서도 조선과 반도체 그리고 자동차산업의 고급기술을 돈 몇푼과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 중국에 넘기려다 적발된 사례는 현대 산업사회의 또 다른 형태의 매국 반역행위임에 틀림 없다.

 

다시 요동시절로 돌아가서, 이괄 일당의 고자질을 들은 후금은 당장은 조선정벌보다 명나라와의 영원성 전투준비가 더 급한 과제였다. 후금의 
상황은 조선 정벌을 다음 정복자인 홍타이지에게 넘겼을 뿐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파병요청이 왔을때도 미온적으로 대하는등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지만 인조와 조정은 국제정세에 까막눈이 되어 명청 교체기(明淸交替期)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뚜렷이 한다. 

이러한 정책은 조선 내부의 군사적 준비나 명나라와의 군사동맹 같은 배수진 없는 당시로써는 무모한 정책이랄 수 밖에 없다. 마침내 홍타이지는 
대몽고 전역을 굴복시킨 1636년 4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면서 스스로 황제로 등극한다. 동시에 조선에게 황제 존호를 올리고 양국을 형제관계
에서 君臣關係로 고치며 명나라 정벌을 위한 戰費로 황금 1만냥과 戰馬 3,000匹등 무리한 요구를 한다. 이것은 배후의 위협인 조선을 치기 위한 
빌미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오히려 단교를 의미하는 절화교서(絶和敎書)를 보내는 명분을 취했지만 병력은 고작 의주 지역의 7000명으로써 침략에 
대비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해 12월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한 滿蒙漢 연합군 12만 병력  앞에 무릎을 꿇을수 밖에 없었다. 조선국왕 인조는 포위됐던 남한산성에서 1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추위와 식량부족 때문이었다. 지금의 송파구 한강 나루터 삼전도(三田渡)에서 조선 국왕 인조는 세자와 함께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루고 앞으로 군신관계, 즉 신하의 예를 다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이로부터 조선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2백60년간 “중국의 속국”이라는 치욕의 명칭을 달고 살아야 했다. 

 

정복자 누루하치는 만주지역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수렵사회를 영위하던 여진족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하면서 권력 집중화 과정을 거치고 요동의 
농경지역을 장악, 농경민까지 지배하게 된다. 그는 8기군(八旗軍)이란 독특한 군사조직을 만들어 주둔과 철수, 행군과 수렵, 그리고 전투수행에서 
기동력과 효율성을 발휘,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황,백,홍,남색의 기치(旗幟)로  동서남북 방위에 구분하고 위 네가지 색 기치에 
붉은색과 흰색 테두리를 둘러 동서남북의 각 중간방위에 위치시켜 8개의 깃발로 움직이는 군사조직이다. 중국에서 8의 숫자는 전체를 의미하며 
모든 가능성의 현현(顯現)과 행운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8월8일 저녁 8시에 개막식을 가졌다. 올림픽을 축하한 세계인들은 화이론(華夷論)의 8이 아닌 인류애의 
8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여하튼 팔기는 300명을 기본조직으로 하고 이를 1니루(佐領)라 부르고 5개 니루가 1參領, 다시 5개 참령이 1都統이 되는 
조직으로써 각 좌령은 농사는 물론 양병과 군사훈련까지 책임지는 治民官인 동시에 行軍官이었다. 이 조직은 서로를 감시할수 있으며 군사작전시 
서로를 경쟁시켜 논공행상하기 쉬운 장점이 있었다. 누루하치의 10년과 홍타이지의 16년, 북경에 入城하여 명나라를 멸망 시킬때까지 연전연승 
할수 있었던 원동력이야말로 바로 이 팔기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1644년 북경에 입성한 八旗部隊는 모두 24기에 20만명 이었다고 한다. 소수의 만주인들이 중국을 지배한 방법은 역시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무력을 
앞세운 공포정치가 아니겠는가. 중국의 漢族은 그후 수십년간 청의 조정에 대해 줄기차게 반란과 불복종으로 대항 했지만 팔기군의 무력 앞에서는 
죽음밖에 없었다. 무자비한 살육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중국을 다스리며 장악해 나갔다. 결국 漢族은 이민족인 여진족에게 나라를 멸망 당했지만
여진이란 민족은 수백년 세월이 흐름에 따라 漢族에 흡수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어져 버렸다. 중국의 역사에서 宋元 交替와 明淸 交替는 몽고와 
만주의 對漢族 정복이었지만 모두가 漢化 되었다고 할수 있다. 

팔기군에 배속되어 청나라 건국에 이용당한 몽골은 청의 붕괴 이후에도 러시아의 분리정책에 의해 분리되고 구심력을 상실한다. 몽골은 결국 
수백년간 청조에 복속 하다가 1911년 청의 멸망 1년후인 1912년 “보크트항” 정권을 수립하여 외몽골로 독립하고 내몽골은 외몽골과의 통합에 
실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하튼 만주족 정체성의 원천이며 기반이 되는 팔기제도는 그후 순치(順治),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제(乾隆帝)를 거치며 다소의 변화가 있었지만 더욱 공고히 발전하여 청조 유지의 버팀목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면 청 조정이 18세기 청나라 재정의 20내지 25%가 총인구의2%도 채 미치지 못하는 旗人들에게 배정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만큼 애착을 가진, 
강압과 폭압의 팔기제도의 정치정신은 아직도 중국에 고스란히 베여 있다고 한다면 필자의 과잉 진단일까.

 

BC 221년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첫 번째의 제국으로 등장한 이래 漢,唐, 宋나라로 이어지면서 제도와 학문, 문화와 
기술의 발전에서 괄목할 만큼 사회의 진화를 이룩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중앙집권하의 전제폭정이 뒷밭침한 결과이다. 민중을 
개미목숨으로 여기는 중국 지배층의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민주나 공화의 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로지 경찰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의 강력한 통제 속에 소수 통치자들의 끝없는 패권욕망은 이웃나라에 고통을 주고 대다수 민중에게는 
밑바닥 인생의 희생을 강요 하는 것을 담보하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진나라가 천하통일하기 전인 춘추 전국시대에 仁義 와 德治를 강조하는 
공자와 맹자, 노자와 장자등 동양에 불멸의 사상을 전파했던 훌륭한 중국인이 더 많았다. 그들이 자랑하는 소위 康雍乾(康熙帝, 雍正帝, 
乾隆帝)盛世라 함은 이웃 국가와 지역을 침략, 점령함으로써 오늘의 중국영토를 확장한 패권의 팽창시기이기도 하고 그 전통은 불행 하게도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大航海 시대 이후 식민지 제국을 이룩했던 스페인,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등의 서구의 열강들은 2차 대전 이후 지배했던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 하거나 자치령 혹은 보호령으로 만들어 그들의 문화와 역사, 인권과 자치를 보장하고 있지 않는가. 베트남을 프랑스화 하기위해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주라던지, 필립핀을 미국화 하기 위해 미국인들이 대규모 이주 한다면 세계인들의 웃음을 사는 코미디가 될 것이다. 또한 영국의 聯邦國인 
호주와 캐나다,뉴질랜드는 완전한 독립국으로써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선진국이다. 

서남공정이나 서북공정은 그렇다 치고라도 2천년 넘게 국경을 맞대고 함께 싸우고 웃고 울며 살아온 한국과 중국 사이에 동북공정은 또 무엇인가. 
서로가 다 잘 알면서…  또 연길의 조선족 자치구는 어디로 치워 버렸는가. 또한 간도문제는 무엇인가. 이웃이 불행하게 의식이 없어져 갈 때 
제3자와 속닥거려 이웃의 텃밭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고 말 한마디 없는 태도는 또 무엇인가. 

 

孔子의 한 말씀이 생각난다.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義를 먼저 생각하고 소인은 利를 먼저 생각한다.)

 

200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