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의 正體(下)-中國의 虛虛實實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은 중국 동부의 강소성 출신이지만 어린시절 백부를 따라 중국 동북지방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그는 1917년과1919년 사이에 일본유학을 했는데1918년7월28일 부산에 배로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한반도를 종단하여 중국으로 귀국한 적이 있다. 
                  아마도 여름방학을 맞아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로 해서 중국 땅에 갔을 것 같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중국에선 청제국이 멸망후 
                  공산당이 태동의 시기를 맞으며, 우리나라에선 일제하 암흑기 속에서 3.1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 젊은 주은래는 
                  자신이 종단했던 경의선 철길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조선을 삼키고 결국 중국대륙마저 침입할 수 있는 루트로써 그의 가슴에 깊이 각인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그로부터32년의 세월이 흐른후1950년6.25전쟁이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예상외로 역전하는 복잡한 양상을 띄우자 “미국이 그 
                  옛길(老路) 을 따라 중국을 위협” 한다고 진단했다. 주은래는 이미 모택동에 이어 제2인자로서 중국의 외교를 주무르는 실권자가 되어 있었다. 
                  미소(美蘇) 냉전구도하에서 미국이 일본에 대한 전쟁책임을 느슨히 하고 오히려 일본을 미국의 전략적 동반자로 재빠르게 격상하는 변화 속에서 
                  중국의 지도자들은 거침없이 북진하는 한미 연합군이 “그 옛길”을 따라 침입하는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 6.25전쟁에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참전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이 항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스탈린의 참전 요청 혹은 승인설은 그 형식을 빌렸을지는 모르나, 실은 전쟁이38선을
                  넘지 않는 한반도 자체내의 전쟁으로 지역화 하는데 군사적 외교적 총력을 그것도 피동적이 아닌 적극적인 방법으로 수행했던 것으로 확인 되는 
                  대목이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방해한 세력은 바로 중국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세계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인1945년경, 중국 공산당의 무장 군사력은 때로는 국공내전(國共內戰), 또 때로는 항일전쟁(抗日戰爭)을 통해 중국 
                  내륙에 위치한 연안으로부터 산서성, 화북성 등지로 급속히 팽창해 나갔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공산당과 홍군(紅軍)의 관심은 호남성, 광동성, 
                  강서성 같은 남부와 내륙에 치중해 있었지, 동북의 요령, 길림, 흑룡강성으로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었다. 국민당의 주력부대가 남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또는 만주국(滿洲國)이 있던 이 지역은 갑자기 
                  정치적, 군사적 진공상태가 되고 만다. 중국 공산당은 재빨리 동북지역을 탈취하라는 특명을 내리고 전국의 전략 방침은 북으로 발전하고 남쪽은 
                  방어에 역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중국 공산당은 소위 이북제남(以北制南)과 선북후남(先北後南)의 전략방침을 굳히고 무장역량을 
                  동북3성의 점령에 집중하게 된다. 일본의 관동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만주지역이 남하하는 소련군에 의해 점령 당할지도 모를 우(愚)를 사전에 
                  막고, 이 지역의 지하자원을 보호하며 일본군이 보유한 막강한 군사장비와 보급품을 선점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복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전쟁 중 만주 지역에서 매년3억엔의 자원 재화를 戰費로 마련할 수 있었으며 이 돈은 관동군뿐만 아니라 소위 제국전쟁에도 지원 되었던 
                  것으로 戰後 밝혀진 바다.

 

                      이는1945년9월에서11월까지 임표(林彪)등 정치국 중앙위원의3분의1과 연안, 화북 화동 등지에서 차출한 공산당 간부2만 여명 그리고 팽진(彭眞)을 
                  수반으로 한11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 지역으로 급파 된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중국 특유의 인해전술이 엿보여 흥미롭다. 소련이 만주에 
                  대한 그 어떤 딴 마음을 감히 가질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써 동북3성은 중국 공산당의 전략 기지로써 그 위치를 굳히게 되었고 실제로 
                  만주 지역의 자원과 공업력을 바탕으로 국민당 세력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마침내1949년 모택동의 공산국가를 수립 할 수가 있었던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先北後南이요, 以北制南이었던 것이다.

 

                       청조가 명나라를 멸하고 북경에 입성한1644년부터 순치(順治), 강희(康熙)제와 옹정(雍正)제 기간(1661~1736)에 이르기 까지100여년 동안은 
                  明과의 전란으로 황폐 할대로 피폐해진 요동지역을 재건하기 위해 한인들의 이 지역에 대한 농업 이민을 적극 권장 하였다. 이는 또한 북경의 
                  지배계급으로 대거 이주한 여진인들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건륭(乾隆)제(1736~1795)에 들어 와서는 한족들의 유입을 금지 
                  시켰다. 화북성이나 산동성 등지에서 유입된 한족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 오히려 지배계급인 만주인들의 생계를 위협할 뿐 아니라 기인제의 
                  존속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조 말기에는 이미 기인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무의미 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부의 
                  부패는 무능한 지배층의 정당성에 타격을 주고 만주인들은 漢族들의 타도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1840년 소위 아편전쟁으로 촉발된 서구제국의 중국 침략은 청제국을 몰락의 길로 몰아 넣었다. 이로써 수백년간 팔기(八旗)에 편성된 旗人과 
                  그렇지 않은 民人으로 구분 지워진 소위 기민제(旗民制)를 통치기법으로 삼아온 청조의 통치계급인 여진계 만주인들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 뒤로 이어지는 “태평천국의 난”이나 “양무(洋務)운동” 등 중국 대륙의 혼란상은 멸만흥한(滅滿興漢)이라는 기치아래 순수 중국 漢族의 청조에 
                  대한 대반격이며 분노의 분출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중국의 國父로 추앙 받는 쑨원(孫文)이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성공 
                  시킬 때까지의 구호 역시 “만주족 축출”과 “중화회복”이었다. 중국인들의 반청(反淸)의식은 대륙을 뒤덮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지만 국민당의 
                  부패는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뜻까지도 빛 바랜 혁명으로 그치게 하고 만다. 곧 이어 등장한 중국 공산당이 그 이유이다. 공산당은  브루주아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국제 공산주의 조류에 편승하여 국가주의를 우선시 하며 종족 보다는 농민 노동자와 브루주아 계급으로 구분 하고 부패의 
                  국민당을 대만섬으로 몰아 내는데 성공 하였다. 滅滿興漢이란 개념은 노동자 농민이라는 프로레타리아 계급의 대동 단결 속에 묻혀 들고 만다. 
                  族의 바다에서 일엽편주에 불과 했던 만주인의 정체성은 이렇게 역사의 격랑에서 깊은 한족의 바닷속으로 가라 앉았다고나 할까. 지금은 하나의 
                  개념으로만 존속 하는게 아닌가 한다.

 

                      건륭제(乾隆帝, 1735년~1796년, 1799년 사망)42년인1777년, 점점 희미해져 가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편찬된 만주 원류고(滿洲源流考)
                   에는 만주족 자신들의 선조를 周나라 時代의 숙신(肅愼), 漢나라 時代의 三韓, 삼국시대의 夫餘, 남북조 시대의 읍루(?婁)와 물길(勿吉), 唐나라代의 
                   말갈, 신라, 거란, 발해, 백제, 宋代의 女眞, 明代의 建州제위로 설정하고 있다. 중국의 통치민족으로써 그들의 기원과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문헌화, 체계화 시켜 좀더 높은 권위를 지키기 위한 무리한 역사 설정이라고 보여지지만 우리 韓民族의 정통 국가들을 만주족의 역사 체계 속에 
                   기록한 것은 우리 민족이 만주 지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물론 학자들은 이러한 무리한 설정을 18세기 후반 중국을 
                   지배한 淸나라의 과거형 東北工程이었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조선이 빠진 것은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전통과 역사를 가진 나라는 청조와 
                   조선이기 때문에 만주족 역사에 편입 할수 없었다. 또한 만주 지역을 수 천년 지배해온 고조선과 고구려를 쏙 뺀 것은 그들이 선조라고 하는 
                   모든 종족들을 아우르고 통치했던 이 지역의 절대 강자였기 때문에 청제국이 고구려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역사적 아킬레스건 같은 감정 때문일까. 
                   중국의 어떤 사서에는 고구려를 下句麗라고 폄하해 표현한 것도 있다. 다분히 의도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어찌 되었던 여진이든 거란이든 만주족들은 중국의 漢族化 되었으며 중국이 고대 시절부터 호칭하는 소위 요동 지역의 동이족(東夷族)중에는 
                   한반도에 사는 韓民族이 유일하게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남아 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조선의 역사에서 을지문덕, 이순신, 그리고 최영을3大 巨傑로 꼽았다. 1910년 일제에 항거 망명 하면서 
                   “동국 거걸 최도통(東國 巨傑 崔都統)”이란 역사 전기물을 썼다. 풍운의 사학가인 단재는 고려말 최영(崔瑩) 장군을 우리민족의3대 영웅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 하였다. 고려말 元明 교체기등 동아시아에서 급변하는 정세와 국내의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는 갈등속에서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북쪽의 홍건적과 남서해안의 왜구를 징벌하는 최영 장군을 역사적 위인으로 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정도전(鄭道傳)등이 
                   최영의 북벌계획을 효패(孝悖)와 광망(狂妄)이라 폄하한 것을 두고 이것이야말로 “노예두뇌”의 소치라고 크게 질타 하고 최영이 계획한 북벌
                   계획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해야 할 당연한 임무였다고 아쉬워 하고 있다. 고려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며 북변 일대를 
                   요동에 귀속 시키려 하자 최영장군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8도 도통사”에 취임 했던 것이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요동정벌의 선봉장으로 명령 받은 최영의 휘하 장수 이성계(李成桂)는 압록강변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만다.                                                                                                                         

 

                         단재 선생은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계승하지 못하고 조상의 땅을 잃어 버리는 이 결정적 사건을 매우 애석해 하고 있다. 요동으로 가야 할 
                    이성계는 반란군이 되어 개경으로 난입하여 상관인 최영을 체포하여 참형한다. 그의 죄목은 공료죄(攻遼罪)이다. 요동을 공격한 죄란 뜻이다. 
                    그렇다면 이성계는 명나라 신하인가 고려의 신하인가. 역사에선 가정(假定)이란 성립될 수 없지만 그의 손자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과 
                    그의 역성 반란이 우리 역사에 던지는 명(明)과 암(暗)의 수치의 크기는 어떻게 표현 될까. 그 답은 독자 각자에 맡기고자 한다.

 

                          다시 중국의 역사 속으로 돌아와 그들의 중화론(中華論)을 보자. 중국 한족의 근간이라 할수 있는 화하족(華夏族)은 하나라, 상나라, 혹은 
                    그 이전의 전설시대에는 중국 대륙 내부인 중원(中原)에서 기원 했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中華)이고 동서 남북 사방에 오랑캐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이들을 오랑캐 이(夷)로 표현한 것이 아니던가. 소위 화이론(華夷論)이다. 서쪽에는 서융(西戎), 남쪽에는 남만(南蠻), 북에는 북적(北狄), 
                    동쪽에는 동이(東夷)라고 불리웠다. 처음 중원에서 東夷라고 불렸던 곳은 중국대륙내의 동부 해안지역 즉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그리고 절강성 
                    일대였다. 그러던 것이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東夷의 개념이 바뀌게 된다. 더욱 동쪽으로 확대되어 요하 일대와 그 동쪽인 요동지역 
                    지금의 동북3성과 한반도 및 왜열도를 지칭하게 된다. 소위 오랑캐 영역이 에스칼레이트 되는 셈이다. 

 

                          청(淸)제국은 명나라 영토의 거의2배에 가까운 영토를 확장했다. 서쪽의 신장 위구르와 남서쪽의 티베트, 북쪽의 내몽골 그리고 동북의 만주 
                     지역등이다. 화이론 때문일까. 그 화이론(華夷論)은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일까. 

 

                     2008-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