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戰爭과 抗美援朝戰爭


    



        6.25 전쟁은 중국에서 조선(朝鮮)전쟁으로 불려 지다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으로 변경 
명명된다. 1950년 6월25일 전쟁 발발 시점부터 중국정부는 조선전쟁이라 이름 붙였다. 6월27일 
미7함대가 대만해협에 배치되고, 7월8일 맥아더가 조선전쟁을 지휘하는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중국의 관심은 대만보다 동북 변방 지역으로 모인다. 1950년 10월8일 중국중앙위는 조선전쟁을 "보가
위국(保家衛國)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으로 규정하고 미 제국주의가 조선전쟁을 통해 중국을 공격
할 것으로 간주한다. 중국 공산당은 북한의 6.25 남침전쟁을 국제전(國際戰)으로 그 성격을 바꾸고 
항미원조를 통해 중국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고히 만드는 보가위국의 기회로 삼는다. 조선을 원조
하여 미국에 대항한다는 항미원조는 대외적 명분이요, 참전의 진정한 목적은 대내적 보가위국이었던 
것이다. 

       10월25일 중공군은 일제히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내전에 참전한다. 맥아더 장군도 중공군의 참전
을 "새로운 전쟁이 시작 되었다."고 표현한다. 우리에겐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는 중공군의 참전은 중국 
자신의 보가위국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외교와 내정을 책임지던 공산 중국의 주은래(周恩來) 
수상은 "조선전쟁은 남한괴뢰를 앞세운 중국에 대한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한다. 옛길(老路)을 따라 
일본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중국을 침략 했듯이 미국도 같을 것으로 예단한 것이다. 주은래는 젊은 시절 
일본유학을 마치고 연락선으로 부산에 도착, 경의선 열차로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간 
경험이 있다. 그는 이 길을 老路(옛길)라 불렀다. 옛길의 추억은 전쟁의 성격마저 바꾸는데 기여한 셈이다. 
주은래는 한반도의 전쟁상황을 활용하여 건국초기 중국사회의 혼란과 핍박한 경제, 그리고 자체 군사력 
정비와 뒤쳐진 산업을 궤도에 올리려는 기회를 휘어잡은 것이다.

        미 공군의 장백(長白)과 지안(集安) 지역의 월경 정찰비행을 빌미 삼아 주은래는 "미국은 일본의 
군사기지를 이용하고 일본군국주의를 계승하여 청일전쟁이래의 역사를 답습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중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서는 동북을 선점하고 동북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반도를 점령해야 
한다는 방법을 쓰고 있다."고 맹비난 하였다. 중국의 동북지역의 공업시설이 공격받고 인명피해가 참전의 
주요원인이라고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또한 미국이 조선과 타이완 그리고 베트남의 주요 3개 루트를 
통해 중국으로 진격해 온다면 중국은 조선을 택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의 산악지형은 
중국의 기동전에 유리하며 조선과 소련이 이어져 있어 소련의 원조를 받기도 쉽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국의
공업시설이 밀집된 동북지역은 그들이 지적한 대로 중국의 사활이 걸린 지역으로 한반도의 정세를 과잉 
적용하여 과민반응을 보였던 것은 지금도 적용되는 중국의 변방정책이다. 

        중공군의 참전 이후 북한의 모든 상황은 중국의 임의대로 좌지우지 되었다. 심지어 철도와 운수 
관할권까지 접수하였다. 김일성의 이의제기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전쟁 발발 이후 1년이 조금 지난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처음 정전회담이 개시된 후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남북의 일진일퇴의 소모전은 
그칠 줄 모른다. 38선 부근에서의 고지(高地) 점령전(占領戰)은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 
조인날까지 계속된다. 중국은 그 기간을 놓치지 않았다. 중국은 전쟁을 빌미로 당시 앞서가던 소련의 
무기와 군수물자의 원조를 받고 낙후된 공군과 포병, 장갑차부대, 해군함대등 군부대의 편제와 운용은 
물론, 군수산업까지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내부적으로는 항미원조를 위해 비행기 대포제작 모금
운동과 증산 절약 운동등 애국심 결집을 도모하여 내부적 결속을 이루는 반면, 숭미(崇美)내지는 공미(恐美)
의 인민사상을 경미(經美), 멸미(蔑美)의 자신감으로 바꾸는 일대 사상혁명의 수준까지 발전 시킨다. 

        만약 1953년 3월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전쟁의 참화는 더욱 커지고 휴전은 그 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면 만주 폭격을 비롯한 38도선을 넘어 다시 북진할 
것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이 1951년 4월11일 경질되었고, 미국정부가 리지웨이 새 사령관에게 북한지역의 
재탈환이 불가하다고 이미 명령한 사실을 중국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군사기밀 사항을 적에게 
알려준 셈이다. 세계 전사상(戰史上)  이런 경우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6.25 전쟁은 38선 부근에서 끝나고, 
남북 쌍방이 승패 없이 무승부로 다시 원점에서 대결할 운명을 잉태한 것이다.

        스탈린 사후 소련외상 말리크가 유엔의 정전제안을 수용하고 중국에게 요구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소련의 군수물자를 원조받아 국방건설과 중국군대의 무기 현대화 작업은 더욱 속도를 내었을 것이다. 6.25 
전쟁은 열전(熱戰) 1년, 휴전협상 2년이라는 기이한 전쟁형태를 이루고 있다. 중국은 겉으로는 항미원조 
전쟁이었지만  실제는 이웃나라의 피눈물로 자신의 보가위국을 획득한 전쟁이었다. 한반도의 피눈물을 먹고 
자라는 또 다른 한나라가 있다. 일본은 6.25 전쟁으로 2차대전의 폐허 속에서 경제재건의 기사회생 기회를 
마련한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모택동은 중국의 지원군 참전여부는 미군이 38선을 넘을 것인지의 여부라고 피력한바 있다. 사실 
1950년 신생중국의 군사와 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을 예견 못한 맥아더는 1950년 10월7일 
38선을 넘어 북진 하였다. 모택동은 이에 주저 없이 다음날 10월8일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 시키라는 명령과 
함께 중국 인민 지원군 편성을 지시 하였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6.25전쟁은 "맥아더의 전쟁"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니다. 맥아더가 끝까지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유감일 뿐이다. 미국은 중국과의 확전(擴戰)이 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것으로 우려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가능한 상상에 가깝다. 그 당시 원폭은 미국
만이 갖고 있었다. 소련과 중국은 미국의 전쟁상대가 아니었다. 여하튼 한민족의 자멸수준까지 갔던 3년간의 
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막대한 재산손실, 처참한 국토의 폐허화 그리고 동족의 갈등과 증오만 남긴 채
끝났다.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적대세력과 국경을 공유하는 것을 용인 하지 않는다. 그래서 완충지역을 두고자 한다. 
중국은 북한을 그러한 개념으로 다루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남서쪽의 티베트 점령, 북서쪽의 신장위구르지역 
강점등이 이에 해당한다.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중국은 이제 한반도 전체를 중화 우호권역
으로 정책을 수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니 노골적으로 한미동맹이 한중 우호를 심화시키는데 방해 요인
이라고 속내를 보인다. 우리의 입지가 좁아 지는듯하다. 한국은 경제와, 군사 그리고 정치와 사회면에서 강대국의 
내실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적대 세력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할 경우 그들에게 치명타를 입힐 정도의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외교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혹은 통일한국)이 동북아에서 견제(Check)와 
균형(Balance)을 유지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한국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문화적, 사회적 매력을 가진다면 
그것은 상기 목표달성에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DMZ 공원화는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 "를 내포하고 있으며, 악몽 자체에 도전하는 아름다운 여정이 될 것이다.



2014.12.08




| 민족의 자산 DMZ를 자연 그대로 보존하자 | |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 섣부른 개발론을 경계한다 | | 비무장지대(DMZ)를 吟味한다. |

| Ho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