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에서 배우자


===內憂는 外患을 부른다.===

內憂가 계속되면 外患이 온다. 외환이 깊으면 국가는 망한다. 역사의 평범한 교훈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조용한 날이 없다. 국가적인 전체로 볼 때 한국이란 사회는 내부적 갈등으로 인한 소요가 끊이질 않는다. 외국인이 볼 때 한반도의 민족은 통일을 멀리한 채 둘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을뿐만 아니라 남북 모두의 내부에 끊임없이 내우가 진행되거나 엄청난 내우의 폭팔 가능성을 안고 있는 어리 석은 종족쯤으로나 비쳐지고 있지는 않을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 보며 통렬한 책임감과 함께 그 해결책을 제시 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인 것 같다.

우리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우리 내부에 그 원인이 뿌리 박혀 있는 것으로 믿어져 과거 조선의 封建사회가 왜 근세 선진국가 형성기의 대열에서 落伍되어 內憂外患의 소용돌이를 극복하지 못한채 自滅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것 같다.





===悲劇의 歷史는 왜??===

우리의 近世 역사는 불행하게도 勝利 보다는 敗北가, 榮光 보다는 屈辱이, 富裕 보다는 가난이 훨씬 더 많이 점철돼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周知 하는 바다. 국운이 기울어 급기야는 국권 마져 빼앗기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으져 대륙으로 또는 바다 밖으로 내몰려 새 삶을 찾아 허덕이게 되고 그러지도 못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굶주림과 불행의 極限 상황 속에서 살게 되었다. 남의 힘에 의해 맞은 해방은 곧 이어 민족과 국토의 兩分현상으로 나타나고 세계냉전의 전초기지화 된 국토에선 서로가 부모형제의 가슴에 대창을 꼿는 패륜의 비극적 전쟁도 마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 까지의 원인 분석 작업은 그동안 여러 분야에서 행하여 왔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근원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근거를 두지 않을수 없다.




끊임없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因果應報라는 역사의 속성 때문 이라고나 할까. 조선왕조 500년의 특징은 우리 민족사상 일찌기 유례를 찾아 볼수 없는 가난의 역사이다. 양반과 상민의 2원화된 사회구조 때문이다.양쪽이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는 관계가 아닌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시와 군림의 대상으로, 또는 증오와 패배감 그리고 자포자기로 생을 마감하는 다른 한쪽이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로 구성된 국가가 강할리가 없다. 먹는것이 어려울 정도의 가난한 백성은 민란을 일으키고 이러한 갈등으로 인한 내우는 외환을 불러 주변국가의 外侵을 誘導하게 된다.





===不公正과 貧富隔差가 不安要因===

내우외환으로 국력은 극도로 쇄퇴하게 되고 가난한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의 路程에서 지배 계층인 정치 관료 집단의 부패와 무능은 국가통치의 기강마져 무너떠려역사의 수레바퀴를 正道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마지막 機會마져 상실 하게 된다는 点을 간과 할 수가 없다.국가사회의 기강 만이라도 바로 서 있었다면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이러한 위기를 탈출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확산과 공감은 국민들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라도 주어 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상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행태는 능력위주의 국가발전을 왜곡 시키고 특정세력 우위의 일방적 통치를 자행 했을뿐이다. 이로써 공정성이 결여된 기회탈취 현상은 사회 전반에 갈등을 심화 시키고 일반 백성들에게 무력감을 심어 주었다. 또한 권력 만능주의를 만연시켜 모두에게 풍요한 삶을 약속하는 농업과 공업의 물산장려를 등한시 하는 결과를 초래 함으로써 국력의 약화는 물론 국민 모두를 가난의 불행으로 몰아 나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사회의 인재들은 官職에 오르는 것이 인생 최대 최고의 목적일뿐, 농업과 공업 같은 생산의 풍요함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을 천시 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권력만이 인생의 목적이다 보니 자연히 비생산적인 파쟁과 朋黨의 조성만 일삼을뿐, 정치의 근본 목적인 國利民福의 통치철학이 없는 虛構의 정치가 민생을 塗炭에 빠지게 한것은 어쩌면 당연한 歸結인지도 모를 일이다.

  백성들의 가난한 생활상은 근세이전 조선조 초기인 명종때에도 그 기록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꺽정이란 의적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 역시 가렴주구의 착취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반발이 주제이다. 국정은 뒷전에 둔채 중앙으로 보내는 조공품과 자신들의 理財에만 혈안이 된 당시의 지방 土豪 세도가들의 발호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과격한 의사표시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


 



===지도층의 悖倫이 內憂를 誘導===

임꺽정 활약 시기인 1550년 부터 20여년간은 임진왜란 발발 30~40년 전의 시대로써 이미 外患을 自招 하리만큼 內憂가 極甚 했음을 반증 하는 것이다.

  단종을 폐위 시키고 피의 정권 탈취극을 벌였던 세조 때만 하더라도 국가 기강이 문란 했던 것은 마찬가지 였던것 같다. "이 시애의 난"은 바로 국가기강 해이에 대한 호족의 반란이라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불법적 정권 탈취에 공헌했던 공신들의 공직 차지는 지방 호족들을 자극시켜 국가권력에 도전 하는 반란을 일으키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제공 하였던 것이다.

  어느 지배 집단이던 권력의 장악은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국리민복의 수단 이어야 하며 그 과정이 공정하게 이루어 져야 만이 국가의 기강이 정의의 바탕 위에 바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조선 시대의 내우는 사실 건국 초기 부터 시작 되였다.우리에게 군림만 하였던 明에게 정의의 一戰을 하려고 하였던 고려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항명의 李成桂가 어찌하여 고려를 멸망케 하고 조선을 건국 하였는가를 연구 할 필요가 있다.어쩌면 우리 민족의 운명과 역사를 滿洲 땅 더 넓은 무대로 확산 시켰을 지도 모를 明과의 대결 정신은 그 이후 慕華思想이라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정신적 굴레로 변질되어 조선 500년 동안 내내 "조선은 중국의 屬國이다"라는 오명을 세계에 심어 왔던 원인을 제공한 것이나 아닐까.

 우리의 국토를 반도 내에 국한시켜 外部指向의 적극적인 국민성을 만들기 보다는 內部葛藤의 소극적인 그것은 급기야 조상의 활동지 였던 광활한 대륙을 되찾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는 결과를 가져 왔던 것이다. 전문가와 碩學들의 이점에 대한 연구와 규명이 좀더 체계적으로 이루어 졌으면 한다.

 태조 이성계의 건국동기에 대한 정통성 내지 도덕성 논란은 논외로 치부 하더라도 그후 줄곧 계속된 아들들의 정권 쟁탈 싸움,세조의 권력 탈취극과 사육신 사건, 연산군과 광해군의 폭정등 국가 리더 그룹의도덕성 결여및 부패 무능은 결과적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로인한 국민들의 생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기근과 기아의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당연히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 한다. 이 시애의 난,임꺽정의 출현 등이 당시의 민심을 잘 반영 해 준다.


 



===國家紀剛과 意識構造는 相關關係===

국가 기강의 문란은 정치권에서 여러가지 사건을 발생 시키지만 폭정을 종식시킨 인조 반정, 중종 반정등 왕권의 잦은 교체는 정권이 한밑천 잡는 도전의 대상일뿐 국리민복의 성취도구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무오, 갑자, 을사, 기묘사화등 정권 언저리에 기생하던 정상배 집단끼리의 살인극은 합리와 도덕이 바탕이 돼야 할 통치 집단을 아집과 독선,당리당략,사리사욕의 차원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이기적 소인배 집단으로 전락 시켜 버렸다. 이틈에 관료 행정 집단은 부패와 부정으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그 위에 군림 하였다. 결과는 어떠 했는가. 당연히 외환이 뒤따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등 8년여에 걸친 국토의 초토화,민생의 실종은 실로 가공할 국가적 아비규환의 상태로까지 되고 말았다. 여기에다 명나라까지 원군이라는 명목으로 이 싸움판에 끼어 들게 만들었다. 이후 불과 50여년 후 병자, 정묘호란의 외환이 또 한차례 뒤따랐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의 불행이 실로 어디까지 미치는가, 민족의 생존이 가능한가,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생활의 터전인 국토는 황폐화되고 백성의 생명은 하루아침에 적의 칼날 앞에 벌거 벗은채 노출되고 말았다.

  몽고의 침략을 포함한 우리 민족사의 4대 被侵史중 倭亂과 胡亂이 조선왕조 시대에 발생 하였다. 두난리가 있었던 1500년대 말과 1600년대 초엽의 국토의 피페는 말할 수도 없거니와 민생의 비참함이야 어이 필설로 다 표현 할 수 있으리오.세도가와 지도층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이름 없던 백성들이 벌였던 처절한 國權 守護 항쟁은 전국 수백 곳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란은 이미 40~50년 전에 무절제한 成宗과 慌淫無道한 연산군의 통치기간이 있었으며, 호란 역시 광해군과 같은 悖倫의 임금이 통치한 과정을 밟고 있음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통치자를 비롯한 지도층들이 백성들의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지니 자연히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 기강은 문란하여 외침을 자초한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그같은 국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오직 권력 유지만이 관심사가 되니 우물안의 개구리 처럼 바깥 세상을 모르게 된다.내부에서 하찮은 권력을 놓고 서로 잘났다고 泥田鬪勾만 일삼더니 결국 종말에는 우리민족 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여 異民族의 손에 국권을 빼앗기는 受侮를 당하고 말았다.


 


===정치의 핵심은 국민에게 共通分母를 제시하는것.===

여기서 우리의 국토 내에서 일어나게 된 전쟁을 생각하게 된다.왜 하필이면 문전옥답이 있는 울타리 안에서 전쟁을 하게 되었을까.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란이 그랬고 호란이 그랬다.고려때의 몽고와의 전쟁,그 이전에는 수나라와 당과의 싸움대도 마찬가지 였다. 근세사에서는 淸日전쟁과 日露전쟁, 현대사에서는 6.25전쟁 모두가 우리 강토에서 벌어졌던 外勢와 또는 外勢 끼리의 충돌이 아니었던가

  물론 적이 먼저 침입 해 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염두에 둔 정치 기본에 충실 했던들 이러한 이해하기 어려운 재앙이 일어날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역사 가운데 발생한 전쟁 이전의 일정 기간을 보면 모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끝 없는 내부 소모전의 양태를 보였다는 것이다. 대단원의 승부가 유보 된채 서로가 상대방을 헐 뜯는 갈등 현상의 지속이다. 이러한 내부 분열기간이 길면 길수록 외부를 보는 眼目은 더욱 흐려지고 왜곡 되며 사회와 국가의 기강은 문란 해졌음을 볼수 있다.

 



조선조 중기,그러한 혹독한 외환이 있은 후에도 정치권은 반성 할 줄 모르고 참으로 끈질기게도 당리당략만 앞 세운 채 서로를 헐뜯는 消耗戰만 계속한다. 사화는 필연적으로 당쟁을 낳았고 당쟁은 또다시 세도정치를 잉태 하게 된다. 東인과 西인, 南인과 北인, 노론소론,대북소북,그것도 모자라 대윤과 소윤등으로 세포 분열 되듯이 遠心力으로만 한없이 작용하는 정치권,이런 바탕위에 무슨 민생이 있고 민복이 존재 할 것인가.정치권을 책임지고 콘트롤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의 존재인 당시의 절대 왕권은 慧眼의 리더쉽 없이 당파의 파도에 그 자신이 휩쓸려 중심을 잃고 만다.

  수없이 많은 파벌끼리의 경쟁, 구심력 아닌 원심력 으로만 작용했던 정치권의 에너지가 정해진 국가의 비전으로 모아졌다면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었을텐데.... 마치 근세 일본이 봉건 막부 정권에서 단번에 제국주의 열강에 끼여 들수 있을 정도의 국가 발전의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리더쉽이란 정치를 국리 민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 각각의 이익을 위한 제 파벌들의 에너지를 구심력으로 작용 시키는 기술이다.


 



===지도층의 腐敗가 가난을 부채질===

18세기말 홍경래의 난이 발생 했을때 민생은 草根 木皮로 끼니를 떼우는 백성들이 많았다고 기록 되고 있다. 그런데 필자의 할머니가 1978년도에 92세를 一期로 별세 하셨는데 할머님 말씀이 자신이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세기말경이 된다.그때 나무 껍질과 솔잎에다 쌀알 여러개를 넣어 죽을 쑤어 먹었다는 이야기를 필자가 어렸을 때 들은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경상남도 창녕 산골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할머님에 의하면 그 당시 많은 이웃들이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土亭 이지함 선생은 16세기 임진왜란 30~40년 전에 조선8도를 여행 하면서 굶주린 백성들이 도처에 즐비했고 전염병이 곳곳에 번져 죽은 자를 태우는데 어떤 곳은 마을 전체가 연기로 자욱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17세기에는 병자, 정묘호란이 있었고 20세기 초반과 중반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으니까 조선의 민생을 우리는 짐작 할 수 있다.

18,19세기의 세도정치의 부패상은 三政의 문란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참다 못한 농민의 분노는 마침내 폭팔, 각처에 두루 퍼지게 되어 전국에서 民亂으로 이어진다. 除暴救民의 東學亂은 이때 벌써 그 씨앗을 잉태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조 중기 이후의 끝없는 내우는 또 한차례의 외환을 예고 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그것이다. 신미, 병인 두 양요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과 합류 하는데 초조와 자신이 교차 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길을 확인하고 20세기 국가 전략을 확립한 일본은 그 1차적인 실험대상으로 조선을 찍는다. 드디어 온갖 음모와 모략 끝에 1876년 제물포 조약을 맺게 되고 이를 기화로 일제의 침략은 노골적이고도 용의주도 하게 진행된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 할 때쯤만 하더라도 조선 정치의 자주성은 이미 퇴색하고 일본에 의해 주도 되고 유린 되었음을 우리는 주목 해야 한다. 조정은 守舊派와 開化派로 나뉘어 싸움질만 했었지 토론 끝에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응집된 하나의 결론을 유도 해 낼 줄 몰랐다.



갑신정변 이다,갑오경장 이다,대한제국의 수립등 정치집단의 자주적인 몸부림이 있었지만 동학란 이후의 청일전쟁, 일로전쟁,을사보호 조약등 일본에 의해 주도면밀 하게 진행된 외환의 거대한 물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 이었고 때가 이미 늦어 있었다. 정치면에서 사실상 자주권을 상실한 임오군란 이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 근 30년의 세월이 소요 됐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올바른 歷史意識의 정치인이 많아야 富强한 나라 만들수 있어===

歷史는 우리에게 現在의 處方箋을,未來의 指針書를 건네 준다. 내우의 지속은 외환을 불러오고 외환은 멸망의 길을 안내 한다. 오늘날과 같은 複雜多岐한 산업사회에서의 내우와 외환의 의미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구심점이 없거나 구심점을 향한 추진력이 미흡한 국가는 내우와 외환을 동시에 겪을 수도 있다. 현재의 세계는 대양과 대륙에서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내우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 지도자들의 道德性과 정통성 그리고 발전적인 歷史意識이 요구 되며 관료 집단의 봉사정신과 正直性을 바탕으로 한 公正 하고도 效率 있는 행정 집행을 필요로 함은 말할 나위 없다.




이러한 모두를 이끌어 갈 牽引車는 역시 지도자의 투철한 역사의식 속의 리더쉽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의 지도자 자리는 탈취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공감하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歷史에 대한 책임은 결국 구성원인 國民 各自가 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992년 가을

| 민족의 자산 DMZ를 자연 그대로 보존하자 | |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 섣부른 개발론을 경계한다 | | 비무장지대(DMZ)를 吟味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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