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전야(戰爭前夜)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 100만 이상의 전사자(戰死者)를 내고 수십만의 미망인과 고아들을 
산(量産)했던 6.25! 국토를 남북으로 분할하고 초토화 하고도 모자라 총부리를 서로 겨누며 미워한 세월
이 어언 반세기를 자나 60년을 훌쩍 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자국의 분할을 막기 위해 간계(姦計)를 
부리고 항복한 1945년부터라면 벌써 63년째를 맞는다. 멀쩡한 나라가 38선으로 두동강 나고 5년후 
동족상잔(同族相殘)으로 불리는 6.25전쟁이 발발한 것은 사실 소련의 스탈린이 추구하던 
공산주의 팽창정책이 한 권력광(權力狂)을 이용한 침략(侵略)전쟁이었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시작 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일어 났는지를 알려진 내용 중에서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사항들을 기록해 
보기로 한다. 추가 자료 발굴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길 기대 하면서... 



-1943년11월, 카이로 선언 *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등 3명의 수뇌 회 담 * 한국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고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 시키기로 합의. -1945년 2월, 얄타 회담 *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수상등 3명의 2차 세 계 대전의 연합국측 수뇌회의. 연합국측은 이미 1944년 6월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구라파 전선에서 승 리를 굳히는 상태하에서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결의안등이 있지만 우리와 관련된 사항을 추려 보면, * 소련의 대일본(對日本) 참전을 독려하는 대가로 소련의 극동 진출을 인정하게 되 는데 이것이 한반도에 불행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고 바로 남북 분단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다.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임) *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을 신탁통치 하기로 하되 어디까지나 과도적 조치로서 한민족 의 독립과 주권 회복을 인정 하기로 합의. -1945년 5월7일, 독일의 항복 *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 되며 서독은 연합군이, 동독은 소련군이 점령한다. (이때 일본이 조선주둔군의 작전 관할권을 관동군 사령부로 넘겼다가 5월30일 조 선을 38선으로 분할하여 북조선은 관동군이, 남조선은 일본토 사령부가 각기 작 전 관할권을 맡기로 수정 하는등의 내용은 필자의 졸저(拙著)"역사의 멍 DMZ,어 떻게 풀것인가"를 참조) -1945년 7월, 포쓰담 선언 *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영국의 에들리 수상, 중국의 장개석총통등 삼국 수뇌회담. *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약소국에 대한 "카이로 선언"을 준수 하기로 선언.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1945년 8월8일 소련의 대일 참전 -1945년 8월9일 나가사끼 원폭 투하 -1945년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 일본군의 항복절차를 38선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이받도록 규정한 포고령, 즉 일반명령 제1호가 이날 미국 대통령 트루만의 재가를 거쳐 맥 아더 사령관과 영국, 그리고 스탈린에게 FAX로 전달. -1945년 8월22일 소련군 평양 입성


-1945년 9월 2일 일본 미주리 함상에서 미국에 항복 조인 -1945년 9월 9일 미국의 하지 중장 인천으로 입국


-1945년12월16일 모스크바 3상(三相)회의 개최 *미국의 밴스 국무장관, 영국의 메빈 외상,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등 3인이 회합 10일 후인 12월26일 전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합의, 나준에 중국도 참여하여 모스크바 4상회의라고도 불린다. 1)한국의 임시정부 수립 2)예비조치로 미국과 소련의 군사령부를 대표로 하는 공동 위원회의 설치 3)공동위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 거친후 최대 5년 기간의 한국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협정을 작성한다. 이를 위해 미소중영 4개국 정부가 공동 심의 한다.(5년후면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해가 된다. 소련은 이미 이때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표로 하고 동북아의 패권자로 남진정책을 성공적으 로 이룩하기 위한 로드맵을 작성한 것으로 보임) 4)2주내(46년1월10일)에 미소 공동위원회를 개최하고 행정적 경제적 문제를 조 정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로 합의 -1946년 1월16일~2월5일 미소 공동위 1차 회의(서울) *미국의 수석대표인 아놀드 소장은 양단된 국토를 통합 하자고 제안한 반면, 소련 측 수석 대표인 스티코프 중장은 행정과 경제적 문제해결을 별개지역에서 하자는 등 서로 상반된 견해만을 확인 했으나 서신은 교환 하기로 합의 *신탁통치 반대운동 전국으로 확산 -1946년 2월 8일 *김일성 사실상 북한의 정권이라 할 수 있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조직 완료 -1946년 3월1일 *김일성 소위 북한 정령(政令)을 발표하고 토지개혁 단행. 5정보(15,000평)이상 가진 모든지주들에게 100리밖으로 추방명령및 즉시 강제 실시


-1946년 3월20일~5월8일 미소 공동위 2차 회의(서울) *스티코프 소련 대표는 모스크바 협정 모든 조항을 지지하는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 체에 한하여 협의대상으로 삼겠다고 발표, 소련의 북한 위성국화 음모를 노골적으 로 드러냄. -1947년 5월21일 미소 공동위 3차 회의(서울) *스티코프는 1년이 지나도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 *회의는 교착상태에 빠져 결렬. -1947년 8월26일 *미국은 영국과 중국, 소련에게 모스크바 협정의 조속한 실행을 하기 위한 4개국 회 의 개최를 촉구 *소련이 거부의사 통고 *"스티코프"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 "48년초까지 미국이 전 외국군 철수안에 동의 하면 소련군도 철수 하겠다고 제안" 이에대해 미국은 "이는 UN에서 논의될 한국문제의 일부분"이라고 거절 -1947년 9월17일 *마샬 미국 국무장관 한국 독립의 절차를 규정한 안을 제2차 유엔총회에 제기 -1947년11월14일 *유엔 정치 위원회 한국독립의 절차 규정한 미국의 제안을 절대다수로 채택 유엔 임시 한국 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을 설치 결정하고 다음사항을 의결 1)48년 3월31이내 선거를 실시하되 비밀투표로 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한다. 2)위원단과 협의하여 보안군을 편성하며 3)남북한 군사령관과민정당국으로부터 정부의 제 기능을 이양 받는다. 4)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을 완전 철수한다. -1947년11월14일 *북한에서는 상기 유엔 정치위의 결정이 있은직후 북한만의 헌법 제정을 위한 "헌 법 기초 특위"를 구성 -1948년 1월8일 *UNTCOK 서울에 도착, 12일에 첫 회합 했으나 소련의 협조거부는 본 위원단의 북 한지역으로의 이동조차 하지 못하도록 했다. -1948년 2월6일 *UNTCOK 부득이 남한에서만이라도 독립절차 실시 하기로 결정 -1948년 3월1일 *주한 미군 사령관은 포고령을 통해 UNTCOK 감시하에 동년 5월9일에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5월31일 헌정 국회를 소집해서 7월20일 대통령을 선출하 게 될 것이라고 발표( 실제 선거는 하루 늦은 5월10일에 실시 되었음) -1948년 3월2일 *북조선 최고 인민위는 작년 11월14일 "헌법 기초위"에서 마련한 헌법안 채택 -1948년 5월1일 *북조선 헌법이 북한에서만 통과하고 공산정권 수립 하기로 결정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 실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이승만 대통령 정부 출범)


-1948년 8월25일 *북한에선 소련식 공산주의 선거 실시 -1948년 9월9일 *북한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건국 김일성 내각 수상은 기념사에서 "중앙정부는 조국통일 사업을 제1차로 삼는다."라 고 공언 -1948년10월12일 *스탈린은 북한을 승인 하고 통일정권 수립에 매진할 것을 격려
스탈린은 소비에트 제국의 영토에 한반도를 꼭 포함하고자 6.25 전쟁을 기획,연출,총감독하였다.


-1949년 1월11일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중장이 주북한 초대 소련대사로 탈바꿈하여 부 임 -1949년 2월2일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 수상, 박헌영 외상 그리고 남일 군부 대표등 3인을 초청


*이들은 스티코프 대사와 함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3월4일 모스크바에 도 착하여 스탈린이 직접 주최한 환영 만찬에 참석 *3월17일 소련의 비신스키 외상과 경제 문화협정을 맺고 3월20일 모스크바를 출발 하여 4월7일에 평양에 도착 -1949년 3월17일 *상해에 있는 장개석 국민정부 기관지는 북한정권과 중국 공산당이 상호 방위조약 을 체결 했다고 보도 *주요 내용: 중국 공산당은 북한에 대한 여하한 침략에도 공동으로 방위한다. 당사 자의 일방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쌍방이 다같이 대항하며 1949년 11월1일부터 50년 8월30일까지 만주와 중국북부로부터 무기와 물자 그리고 군력을 북한에 보 급 한다. -1949년 3월경 *주한 미군 철수 문제는 1949년 3월말까지 매듭 -1949년 6월29일 *주한미군 철수 완료. 500명의 군사 고문관은 잔류 -1949년10월1일 *중국 공산국 탄생 모택동 일행은 12월16일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 3개월간 체류 -1950년 2월14일 *"중소 30년 우호조약"을 체결


그 이후 중국 남단에 있던 한국인 李紅光이 이끌던 동북 의용군 산하 부대를 북상 시켜 4월에 북한 인민군 제 7사단으로 개칭 * 제 4야전군의 39군과 40군이 중국 남단에서 북상하여 42군과 합류하여 한만 국 경에 배수진을 형성 -1950년 4월경 *루마니아로부터 10만톤의 석유 비축 *남한의 사전공작을 위해 남한의 각도에 20명씩 비밀조직을 파견, 남로당 출신 연고 지역에 배치하고 당조직을 재건 복구 함으로서 유사시 인민봉기를 획책 -1950년 6월7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통일을 위한 총선을 8월15일 실시 하기 위해서 6월15일부터 6월18일까지 해 주나 개성에서 남북 대표자 예비회담을 갖자고 제의 -1950년 6월18일 *북한군, 러시아어로 작성된 정찰명령 1호 하달 -1950년 6월19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조만식 선생 부자와 남로당간부 김삼룡과 이주하를 맞교 환 하자고 제의 -1950년 6월19일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동의 한다면 21일 서울 혹은 평양에서 회담 갖 자고 평양방송에서 돌연 제의 -1950년 6월22일 *북한군, 38선 주둔 예하 사단장들에게 전투명령 1호 하달 -1950년 6월25일 소련의 6.25 침략전쟁 발발
1) 6.25 전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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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찍은 미국의 "막스 데스퍼" 기자는 1950년 퓰리처 상 (Pulitzer Prize)을 수상 하면서 "내가 비록 전쟁에 강해져 있지만 이 광경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다." 라고 술회했다.

1950년 10월,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남으로 퇴각했고, 유엔군의 퇴각과 동시에 수많은 피난 인파가 폭격으로 끊어진 대동강 철교 다리로 몰려 들었다.


전쟁고아, 미망인,피난민 행렬,국토 곳곳에 즐비한 시체들,소위 인민재판등 전쟁이 연출하는 모든 비극들을 다모은 한민족 역사상 최대의 혼란과 참상을 보인 6.25전쟁이었다.

소련의 야크 전투기들로 무장한 북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출전준비를 위해 전투기에 탑승하고 있다. 전쟁중에 소련군 조종사들도 참전한 것으로 6.25 전쟁사는 기록하고 있다.

소련제 탱크로 무장한 북한군의 진군모습. 당시 남한의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도 보유하지 않고 있었다.

전쟁 발발 사흘만인 6월28일 북한인민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 시청앞을 통과하고 있다.



폐허속에서 뭘 찾을까?

그땐 우리 모두 거지였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뒷편에 중앙청이 보인다.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 38선통과 퇴각

흥남 철수작전,미군의 수송선을 타기위해모여든 피난민.

14,000여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남으로 향하는 미군 수송선 "메레디스 빅토리"호.

전쟁의 비극.일가족이 폐허속에서 노숙하고 있다.

피난민촌(1951년 부산에서)

압록강 기슭 혜산진에 먼저 도착하여 만세를 외치는 국군 선두부대. 이도 잠시뿐 중공군의 참전으로 곧 1.4후퇴로 불리는 퇴각이 시작 되었다.

참전 중공군을 위문하는 김일성.

참전 미군을 위문하는 "마릴린몬로"

야전 짚차를 탄 "마릴린몬로"

미군 위문중인 코미디언 "밥호프"

"트루먼" 미 대통령, 국가비상사태안에 서명(1950.12.16)




<1950년도 김일성의 신년사를 육성으로 기록해 본다.>

" ......... 중략....... 미제의 이승만 도당의 반동으로1949년에는 우리의 사명인 조국통일을 완수치 못했다. 이러한 환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조국통일의 터전을 닦기 위해 북반부에 강력한 기지를 건설케 했다. 1950년도에는 인민군 국경 경비대와 보안대는 전투대비를 갖출 것이며 언제나 적을 무찌를 각오가 있 어야 할 것이다. 승리는 통일과 조국의 자주와 민주주의를 위한 정의의 투쟁을 하는 전체인민의 편에 있다. 금년에는 조국통일을 위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조선인민에게 영광이 있을 것이다. 통일 조선 만세!"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모두가 파괴된 황량한 마을에 혼자된 소년이 구걸을 한다.


아이를 업은 소녀는 또다른 동생의 먹을거리 다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손에든 나무뿌리는 음식인가, 땔감인가.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형제가 햇빛 보며 앉아있다.


누더기를 걸쳤지만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 남았다.


다 부서진 집에 혼자 살아 남았는지 이소년은 누더기를 걸친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초라한 행색의 어린 자매, 그래도 눈매는 초롱초롱하다.


코밑에 콧물자국이 선명하다. 필자의 어릴적 모습이 생각난다. 그래도 큰신발과 개털모자는 구했구나.


추위만 이길수 있다면 누더기 솜바지라도 좋다.


우리들 보금자리, 하늘은 청명하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 땔감을 구한 어린 소년들.


크기는 맞지 않아도 행운을 얻은 소년들.


전란통에도 동심(童心)은 하늘을 날고 있다.


추위와 배고픔에 탈진한 어린 소녀.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목욕 서비스 받는 소년, 이방인의 손길에 잔뜩 겁먹은 표정이다.


착한 구세대와 깡통 찬 신세대?


봇짐과 망태기 든 할아버지와 손녀,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피난길 떠나는 일가족.


팔거라곤 오이와 참외.


지게를 져도 일깜이 있어야지.


황량한 벌판에 홀로선 소녀. 이 소녀의 알길에 행운이 있었기를...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모질게 만들었을까. 거제 포로 수용소안에서도 구호가 난무한다.


수용소내 포로들의 작업 모습.


포로들의 천막촌.


포로들의 망중한.


포로들의 밥공장.


경비병과 포로들.


앳된 모습의 인민군 여성포로.


아직도 살기가 남은 포로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도대체 이념이 뭐길래.


수용소 연병장에 모인 포로들.


수용소에서 압수한 각종 흉기들.


나는 반공포로입니다.


공산당 격퇴를 환영하는 마을사람들의 시위.


시신앞의 고무신 한짝은 시신이 여성임을 말해준다. 이 여성의 비참한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로부터 44년이 지난 1994년 권력광 김일성의 위선(僞善)을 본다. 김일성의 사망시까지 20여년간 오스트리아등 유럽에서 북한의 산업과 군수물자를 조달한 김종률 전 북한대좌가 최근 책을 발간하고 김일성의 초호화판 사생활을 폭로했다. 김일성의 사망직후 북한을 등진 김씨는 16년만에 공개석상에 나와 "이를 폭로 하지 않고는 죽을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김일성은 1994년 7월8일에 사망하였다.



2012.9.6(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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